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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요산 김정한] ⑨ 사회 활동 1985년 부산서 '5·7문학협의회' 결성 주도 이상헌 기자 20081213T163153 | 수정시간: 2009-01-11 [15:04:41] | 14면
▲ 1987년 YMCA강당에서 열린 5. 7문학협의회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요산 김정한. 사진 제공=요산문학관
"74년에 출범했던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은 87년 6월 항쟁 시기에 이르면 거의 와해 상태가 됐어요. 발전적인 해체를 도모했죠. 누굴 대표로 모실 수 있느냐가 문제로 떠올랐어요. 요산 선생을 모시면 아무도 꿈쩍 못할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속으로 했지요. 자실 하던 사람이야 두말할 것 없이 존경하던 어른이니까 따를 테고, 기성 문단에서도 나이로 봐도 김동리 황순원 선생보다 연장자시고 일제시대부터 문단 활동을 하셨던 분이니까 요산 선생을 모시면 군소리가 없을 것이다, 생각한 거죠. 87년 7월쯤 혼자서 부산에 내려가서 선생님을 찾아 뵙고 말씀을 드렸죠. 처음엔 사양하시더니, 젊은이들이 합의하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어요. 아직 공론화는 안됐으니까 올라가서 일 추진하겠으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했지요. 8월 하순께 자실 대표간사였던 이호철 선생이 부산에 가서 정식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그때 요산 선생이 농담조로 백 아무개가 와서 그런 이야기한 지 오래됐는데…, 하셨대요. 그렇게 해서 요산 선생이 회장을 하시고, 고은 선생하고 나하고 부회장이 됐지요." 문학평론가 백낙청이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회장으로 요산을 추대할 당시의 뒷이야기다. 요산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다는 한국앰네스티 고문(1977)직을 비롯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1974), 전국지방국립대학교 교수협의회연합회 회장(1972),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1974), 4·13조치 철회 요구 문인반대서명(1987) 등 요산은 엄혹한 시절에도 가만 있지 않았다. 연로한 탓에 젊은 세대만큼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벌이진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 쓰길 겁냈을 때 기꺼이 그 이름을 쓰게 한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문학평론가 염무웅)이었다. 1985년 부산서 결성된 5·7문학협의회는 요산에게 각별하다. 팔순에 가까운 요산이 '정신 똑바로 박힌 놈들이면 한번 꿈틀거려 봐야 할 거 아니냐'며 먼저 후배들을 다그친 거다. 5·7문학협의회는 부산작가회의의 전신.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장인 평론가 구모룡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 시절에 우리 젊은 세대는 광복동 술집에 모여 울분을 술로 달래곤 했는데, 요산 선생이 이런 시대에 문인이 가만 있어서 되느냐, 단체를 만들어야지, 그런 말을 하셨대요." 요산과 자주 만났던 임수생 시인의 기억은 좀 더 구체적이다. "내가 부산일보 기자로 있을 땐데, 하루는 요산 선생이 신문사로 찾아오셨어. 윤정규(소설가)를 부르더니, 우리도 뭐 하나 만들어야 안되겠나, 하시는 거라. 정규 하고 둘이 의논해서 서울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단체를 부산서 만들어 보라고 하셨어. 1985년이면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지." "윤정규 선생이 부르더라구요. 요산 선생이 부산에 쓸 만한 애들 모아 보라 하더라. 누가 좋겠노, 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지역 단위에서 자생적인 문인단체를 만든 것이 그때가 처음이고, 그 뒤에도 유례가 없지요."(최영철 시인) 1985년 5월 7일 중구 동광동 화국반점에서 문인들 39명이 모였다. 최영철 시인의 말을 빌리면 요산은 독립군 대장 같았고, 어둑한 중국집 2층은 임시정부 비밀 아지트 같았다. 단체 이름을 뭘로 할 건지로 한참을 설왕설래했다. "민족문학해방구로 하자는 사람, 부산민족문학동맹으로 하자는 사람, 온갖 이름들이 나온거야. 그런데 너무 강한 이름으로 가면 전두환 군홧발에 싹도 틔우기 전에 짓밟히고 말 거 아냐. 영감이 상황을 정리해 버렸지. 중국에는 반제국주의 5·4운동이 있어서 그 때문에 민중이 깨쳐나가고 있지 않느냐. 오늘이 5월 7일이니까 5·7문학협의회로 하자, 이러신 거야."(임수생) 그렇게 만든 5·7문학협의회였기에 자부심도 컸다. "5·7문학협의회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 만날 때도 내 너희들 때문에 꿀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5·7문학협의회 회원들의 작품을 실은 무크지 '토박이 2집'이 판매금지 리스트에 오르던 시절이죠."(강영환 시인) 그런데 요산이 아파트 입주자 대표일을 맡았던 이력도 흥미롭다. "나이와 명망을 내세워 거들먹거리거나 뒷짐지고 불평하느니 직접 나서는 게 그의 성품에 맞았기 때문"(조갑상 소설가)일 터. "대신동 삼익아파트에 사실 때 아파트 운영위원장을 하셨대요. 늘 잠바만 입고 다니셨는데, 경비들이 잡상인으로 오해해서 아무리 여기 산다고 해도 못들어가게 한 일도 있었다고 해요. 하루는 밤 11시가 넘어서 어떤 부인이 다짜고짜 이리 추운데 왜 불을 안 때냐고, 전화를 했대요. 요산 선생이 규정 온도 몇 도 이하로는 못 때게 돼 있다고 했는데도 그 부인이 불 때라고 엄포를 놨나봐. 밤늦게 남의 집에 전화 걸 땐 양해를 먼저 구해야 하는 법이라고 요산 선생이 언성을 높이곤 전화를 끊어버렸대요. 그 부인 남편이 판사였대요. 그 판사가 마누라 등쌀에 못이겨 뒷조사를 해봤더니 감당안되는 인물임을 알고 그냥 넘어갔대요."(양맹준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 이런 비화도 있다. "요산 선생이 부산예총 회장 시절 김종필 총리가 부산에 순시를 와서 시민회관 관장실에서 몇몇 인사들을 접견했대요. 요산 선생이 비서에게 총리 만나러 왔다니까 약속 안 된 사람은 못 만난다고 했대요. 요산 선생이 죄지은 일도 없는데 왜 사람을 만나 주지도 않느냐며 소란을 피우신 모양이에요. 밖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JP가 데리고 오랬대요. 요산 선생이 나는 예총 회장인데 예산이 없어서 일을 못하고 있다며 될 수 있으면 돈 좀 내놓고 가라 했대요."(양맹준) 항간에 그 돈을 두고 예총 정기총회 때 설왕설래가 있었다는 후문도 들린다.
'저항작가 코드' 넘어 21세기적 의미 찾아야
입력 : 20081220T162740 | 수정 : 2009-01-11 [14:51:48] | 게재 : 2008-12-20 (14면)  "요산의 작품에 대해 늘 민족문학이나 민중문학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에 동어반복이 되지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효석의 경우 일제시대에는 동반자 작가로 이름을 날리다 이후엔 자연주의로 연구사에서 늘 빠지지 않았어요. 그러다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1973년)'에선 빠졌습니다. 그때의 시대 조류가 유미주의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10년 전부터 몸에 대한 담론이 뜨면서 이효석 연구가 새로운 활기를 갖게 된 것이죠. 요산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진 옛날하고 별반 다르지 않아요." (문학평론가 류종렬)
 
저항, 반골, 리얼리즘과 같은 몇몇 제한된 단어로만 설명되던 요산 김정한에게 해석의 지평을 열어두려는 게 이번 기획기사의 의도였다. 탄생 100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요산의 21세기적 의미를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서동 뒷이야기'에 나오는 일본 철도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처럼 요산 선생은 양심적인 일본에 대한 존중이 있었어요. 단순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요." (문학평론가 최원식) 반일저항작가라는 단일코드를 넘어 아시아 민중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말로 들렸다.
 
요산에 대한 열린 해석은 리얼리즘이란 화두에서 첨예하게 맞붙는다.  
"요산의 소설 쓰기 방식은 인류학자들이 현지 조사를 하듯 직접 찾아다니는 거죠. 경험적 사실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장소도 사람도 구체적이죠. 지역작가들이 리얼리즘을 떠나서라도 그런 자세를 갖는 건 필요하죠. 21세기에도 전지구적 규모로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하거든요. 요산 선생이 관심을 가졌던 '따라지'라 했던 사람들이 없는 것 아니거든요.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도시주변부 빈민, 소외된 여성들, 국가가 소외시킨 사람들…. TV에도 이런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듯이 요즘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도 거의 없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요산이 추적한 인물들이 필요하단 거죠."
문학평론가 구모룡의 말이다. 계속 들어 보자. "요산 선생이 사회적 약자, 생태 환경, 디아스포라라는 가치있는 비전을 일찍이 제시했지만, 실은 그런 비전들을 스케일 있게 그려내지는 못했어요. 문학관에 가면 장편들이 미완성 아닙니까?(평론가 황국명의 조사에 따르면 원고지 1천392매 분량의 제목을 확인할 수 없는 미완성 장편소설을 비롯해 '세월' '난장판'으로 제목이 붙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이 다수 발견됐다.) 장편에 가면 이상하리만큼 세계관이나 이념보다 풍속에 치우치는데, 아마 장편으로 그려 내기에는 요산의 사회적 실천이 작품을 앞질렀던 것 같아요. 문제점이 있는 걸 간헐적이고 파편적으로 당대의 상황과 맞물려 이야기 했지, 총체적 세계의 관점에선 못 다뤘거든요. 생태 환경의 문제가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 문제가 된 오늘날처럼 말이죠. 진정한 극복은 그가 던져 놓은 걸 넘어서 뭔가 만들어 내는 생산물이 있을 때 가능하지요. 요산을 관통하고 넘어서야지 우회로는 넘어서는 게 아니라고 봐요."(구모룡) 
조금 다른 생각들도 있다. "요산 선생은 시인들보고도 '이름없는 꽃'이란 말 제발 쓰지 마라했거든요. 시에서는 그리 판단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시의 뉘앙스를 위해선 '이름없는 꽃'이라고 써야 할 때가 있는데, 선생님은 그것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런 리얼리즘이 아직도 유효한가, 생각해봐야죠. 선생님이 가졌던 사회관이 그 시대로는 유효하지만, 그대로 답습한다면 문제가 있죠."(최영철 시인)
문학평론가 남송우도 비슷한 생각이다. "리얼리즘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묶여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작가를 제한할 수 있어요. 작가의 성실성이 중요해요. 요산이 식물도감을 만들었던 것처럼 본격적인 작품 한 편 쓰기 전에 얼마나 공부를 하느냐가 문제지요."
문학평론가 김중하의 말은 좀 더 직접적이다.  
"요산의 정신을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건 사람 사는 근본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문학이 그 근본에 충실하라는 거지 리얼리즘만 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요산이 잘못한 게 아니라 요산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리얼리즘이란 낱말에 매몰돼 있어요. 폭로니 저항이니, 이런 소재만 가지고 소설 쓰자니까 잘 안되잖아요. 주제는 아주 뚜렷한데, 그걸 모아 놓고 보면 극단적으로 똑같아요. 권선징악이죠. 권선징악은 주제가 아니라고 봐요. 윤리지. 리얼리즘을 너무 경직되게 받아들이면 폭을 안 가지니까 소설이 재미 없어져요. 수양산 그늘이 천리를 간다 했는데, 그 그늘에 묻혀서 후배들이 더 이상 못 큰 거지요. 그래서 요산 그늘을 벗어나라고 했어요. 요산이 글 쓰던 시대의 책무는 그걸로 끝이 났어요. 다음 세대는 선배 위에 올라서야지요.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해요. 옛날식 우물파기가 필요해요. 우물을 깊게 파려면 처음엔 넓게 파야 하죠. 소설은 우물 파는 것과 같아요. 필요에 의해 지식을 얻는 게 아니라 온갖 공부한 것들을 끌어모아야 하지요. 그 엄청난 폭이 소설의 깊이에 반영되는 거죠."
중국의 루쉰(魯迅)은 기울어 가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
요산문학관에 세워진 요산 흉상도 그 말을 하는 듯했다. -끝- 이상헌 기자 t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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